불교의 미륵신앙과 민속신앙의 습합(4)
불교의 미륵신앙과 민속신앙의 습합(4)
  • 장정태 박사
  • 승인 2021.01.24 0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Ⅲ.한반도에서 미륵신앙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대개 득남, 치병, 기복, 수호 등이 중심이 된다 아들 낳기를 기원한 바위를 기자석 또는 기자암이라 하는데 이 바위를 미륵부처로 생각하여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이것은 유감주술의 한 형태로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돌멩이를 바위에 뚫린 구멍 즉 알 바위에 맞춰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선바위나 선돌을 미륵으로 생각하여 득남을 기원하는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는 고을의 평안과 복을 위해 미륵을 신앙하기도 하고, 고을의 가뭄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미륵을 신앙하기도 하였다. 해미읍성에서는 읍성을 수호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사방에 미륵을 조성하여 읍성을 수호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는 미륵신앙과 사천왕, 마을의 동제 등이 습합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미륵신앙은 민중과 더불어 그들의 생활터전의 어느 곳에서나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한 시대에 융성하였다가 시들고 마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숱한 비바람을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온 민족의 밑바닥에 뿌리 밖은 신앙이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 전래한 이후에 다양한 전개를 통해 정착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현세 이익적인 측면에서 미륵을 신봉하였고, 백제에서의 미륵신앙은 이상 국가의 실현, 신라에서는 미륵의 인격적 구현과 현신 성불을 위해 미륵이 신앙이 되었다. 아울러 미륵신앙은 전통신앙과의 습합을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고통받고 핍박받는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미륵신앙은 고대로부터 민간신앙과 많은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다. 이러한 습합은 미륵신앙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며, 칠성신앙, 명부신앙, 산신신앙 등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 인한 법란과 혼란한 사회·정치·경제 상황에서 미륵신앙은 전통불교에서는 강조되지 않았고, 민간신앙과 습합을 이루면서 미륵하생 신앙을 중심으로 신앙되어졌다.미륵신앙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민중의 입장에서 당래불로서 이상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민중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불교의 여러 신앙 가운데 유독 미륵신앙이 민중의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바로 현실에서 용화세계를 구현시키려는 이상에 호감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외세 침략으로 얼룩진 한국 역사 속에서 우리 민중은 항상 고통 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이상세계가 이룩된다는 당래불 사상은 민중들에게 절대적으로 요망되었고, 또한 민중의 희망이기도 하였다. 근대에 이르면서 미륵신앙은 민중적 속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하였으며,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이상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는 당래불, 희망불로서 전개되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루 미륵신앙을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미륵신앙은 그 수용에 있어서 비록 선후의 차이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에 미륵신앙은 현존하는 자료의 빈곤으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공전될 무렵인 372년경 미륵신앙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중국 전진왕 부견은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경문을 보냈는데 이 선물 가운데 미륵상도 들어있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경전속에 미륵관계 경전도 들어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근자에 고구려의 미륵신앙을 알게 하는 두 가지의 금동불상광배명문이 발견됨으로 학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하나는 신묘명 금동삼존불상으로 알려져 있는 무량수상이며, 하나는 영강칠년명 금동 미륵존상의 광배이다.

이 신묘명금동삼존상의 광배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은 아왕등 5이 망사부모의 축복을 위하여 무량수불을 만들었음을 밝히면서도 미륵과의 직우를 기원하고 있어서 고구려의 미륵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혼동된 신앙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륵신앙이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신라나 백제와 상관관계로 어떤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백제의 미륵신앙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서남쪽에 바다를 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진이나 남조에서 바다를 건너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가 백제의 미륵신앙 및 그 사상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하루는 왕(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이 그것을 허락했다. 미륵존상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殿=불각)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미륵사의 창건설화를 통해 용화산 아래 못속에서 미륵불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다.

백제에 있어 미륵신앙 미래에 다가 올 부처님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속에 다가와 우리가 사는 삶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미륵신앙의 특징은 미륵을 석가불의 미탁중생을 제도하고 미완을 보완하는 당래의 불이라는 데서, 젊음과 새로움과 희망과 그리고 이상 실현의 상징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존한 신라대의 미륵상의 상호가 모두 앳되고 젊은 형모인 것에도 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한국의 미륵신앙@사진=한국민속불교학회 제공]
[한국의 미륵신앙@사진=한국민속불교학회 제공]

신라 미륵신앙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 신라화랑과 미륵과의 관계이다.

신라의 화랑은 고신라에 있어 원시공동체적인 유산이라 보여지는데, 이것은 종교적 수련과 무사적 훈련을 같이 하는 청소년의 집단이었다. 처음에는 미녀 2인이 그 집회의 사령자가 되었으나 진흥왕 37(576)에 그 미녀들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어 내분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상대방을 죽이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므로 여성 사령자를 없애고 미모의 남자를 사령자인 화랑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뒤로 화랑제도는 크게 발전하여 신라의 현신, 용장 등을 무수히 배출하였다고 한다. 진흥왕대의 이같은 화랑제도의 정비는 단순히 사령자를 남자로 바꾼것에 의미가 큰 것도 있지만 그 단결의 기초를 미륵신앙에 두었다는 점이다.

사기에 의하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서 이를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여성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남녀양성 구유현상이다. 양성을 구유하려는 것은 하늘(남성(여성)의 융합 또는 신과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것이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당시 사람들이 용화향도라 불렀다는 것이라든지 화랑 죽지랑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진지왕 때에 승려 진자가 항상 堂主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대성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는 미륵선화의 이야기 등은 모두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실례들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화랑도 자체를 미륵신앙에 의하여 결합된 동신자 집단으로 보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나아가 화랑도가 가장 활기를 띤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특히 많이 만들어진 미륵반가사유상이야말로 바로 화랑집단이 찾고 있던 미륵의 모습일 것이라는 견해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을 미륵선화라 하였고 또 화랑의 낭도를 용화향도라고 한바, 용화는 곧 미륵님의 세계란 뜻이며, 향도는 용화교주인 미륵을 향하여 따르는 교도라는 뜻이니 화랑이 미륵선화요 또, 그 도중을 용화향도라면 화랑풍류가 곧 미륵풍류임을 알 수 있다.

신라통일이후에는 그 성격이 대단히 세속화 되면서 또 문명형성초기에 지닐 수 있는 그런 창조적 역할(creative role)이 희석되면서 쇠퇴해버렸지만 원래 그 화랑조직은 세속적 국가조직의 행정체계 기능을 담당하는 것과 다른 순수한 청년 신앙단체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대구광역시 동구 해동로 5길18 101/401
  • 대표전화 : 053-425-1112
  • 팩스 : 053-982-0541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정원 / 통불교신문 후원계좌 / 농협 : 302-1286-8089-61 : 예금주 : 통불교신문
  • 법인명 : 통불교신문
  • 제호 : 통불교신문
  • 등록번호 : 738-35-00577
  • 등록일 : 2018-03-30
  • 발행일 : 2018-03-30
  • 발행인 : 裵哲完
  • 편집인 : 박정원 l 사장 : 아미따 성주스님
  • 통불교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통불교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bulgy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