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선-4 / 마음은 어디에 안주해야 하는가?
내관선-4 / 마음은 어디에 안주해야 하는가?
  • 통불교신문
  • 승인 2018.05.0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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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연극 공연을 바라보는 주시자가 되어야 하지
공연을 지휘하는 감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다.

둘째, 마음은 어디에 안주해야 하는가? 마음은 연극 공연을 바라보는 주시자가 되어야 하지 공연을 지휘하는 감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다.

 

우리 마음만 이탈해서 방관자로 주시해야지 주도하지 말아야 한다. 이 원칙 하에서 다른 중요한 원칙인자세를 지켜야 한다. 불필요한 자세를 취하지 말고, 자세를 바꾸려면 먼저 지각해야 한다. 도반들이 제출한 메모지에서자세에 관한 문의가 많기 때문에 여기서 설명하고자 한다.

좌선을 하다 보면 다리가 아파온다. 그러면 당연히 아픔을 지각해야 한다. 이때 아픔을 지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다리의 자세를 바꾸어야지하는 생각은 일으키지 말라. 지속적으로 자세를 바꾸면 평온할 수 없어서 아집(我执)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된다. 여기저기 불편하다고 계속 자세를 바꾸면 마음이 흐트러지면서 고통을 느끼는데, 아픔은 바로 그 속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아플 때는 단지 아픔을 지각할 뿐이다. 이렇게 지각하고 있을 때 처음에는 비교적 느슨하게 그 느낌을 지각하기만 하면 그 속에는가 없다. 바로감각의 느낌이 고통임을 관하는 것[觀受是苦]’이다!‘가 그 속에 없으면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러면 다시 호흡을 지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참을 수 없는 느낌이라면 그에 앞서나는 자세를 바꿔야 한다고 지각해야 한다. 자세를 바꿀 때도 시종 지각하면서 한다. 절대로 자세를 바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빈번하게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지각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계속 지각해나간다면 어떤 자세를 취하든 상관없다.‘이 자세는 맞지 않으니 나는 저 자세를 취해야겠다고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 그런 분별이 바로 아집(我执)과 아견(我見)의 작용이다. 확실히 양쪽 다리로 결가부좌를 할 수 없으면 한쪽 다리만 위로 하거나, 그것도 불가능하면 그냥 앉아 있어도 된다. 중요한 점은 지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 수행법은 낮은 수준이 아니고 원각경(圓覺經)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원각경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느 때든 망념을 일으키지도 말고, 온갖 망심(妄心)을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고, 망상의 경계에 머물면서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앎이 없는 것을 진실이라고 변별하지도 말라.”

어느 때든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는 가령가 주도하고가 자세를 바꾸려고 한다면 이 분별이 바로 아집과 아견의 작용이라는 뜻이다. “온갖 망심을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라는 당신이 망심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여전히 하나의 망심이란 뜻이다. 나는 내관참선 수행에 참가하였으니 선정을 이루기를 바라다거나, 혹은 신속히 삼마지(三摩地)에 들기를 바라는 것도 역시 망심이니,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방법으로는 선정에 들어도 구경(究竟:궁극)이 아니다.

이번 참선 수행에서 여러분이 파악해야 할 원칙은 우리 모두가 찰나정(刹那定)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찰나찰나의 일념에서 모두가 정념 속에 있고 모두가 지각 속에 있어야 올바른 것이다. 당신이 어떠한 형상을 취하든 모두 선정 속에 있어야 한다.

이 찰나정에 들어가라는 것은 허운(虛雲) 노화상처럼 한 번 선정에 들면 일주일 내내 여여부동(如如不動) 하라는 것도 아니고, 혹은 당신이 바로 지금 초선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 각조(覺照)가 앞서고 지각이 앞서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물론 비교적 완만해야 지각이 동작을 따를 수 있다. 범부는 어째서 망상과 번뇌 속에 있을 뿐 지각하여 살피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불법을 많이 공부했는데도 쓸모가 없는가? 생사윤회에 너무 익숙하고 오염된 마음에 너무 익숙해서 생멸의 무상을 근본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불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나는 많은 불법을 공부했지만 아직 무상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법에 대한 신심이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고 번뇌도 항복시키지 못했어요.”

사실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오염된 마음은 너무나도 허상에 익숙하여 찰나의 생멸을 볼 수 없고 지속적인 환각과 망상만 본다. 마치 한 사람이 횃불을 들고 신속히 돌면 하나의 불을 보지 못하고 불로 된 바퀴가 도는 것만 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한 점을 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사윤회의 환상(幻相)이다. 이때 우리는 앞의 원칙에 따라 천천히 나가야 한다. 지각이 먼저이고 자세의 변환은 나중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각을 유지하라.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서 지각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신이 피곤하고 힘들다! 하지만 가치가 있다. 무량겁의 생사윤회를 바로 이 사흘 반나절의 시간으로 해탈하려고 하는데 조금 수고스러운 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또 이렇게 생각하지도 말라.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지각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잠시 쉬자. 지각과 정념(正念)을 잠깐 동안은 유지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통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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