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왕사 인연처-6 / 나옹왕사 오도 사찰 회암사
나옹왕사 인연처-6 / 나옹왕사 오도 사찰 회암사
  • 이철순
  • 승인 2020.02.26 23: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회암사(檜巖寺) 1348년 나옹왕사 오도 사찰
지공, 나옹, 무학(삼화상) 부도·탑비 봉안사찰

회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영성각(影聖閣)등을 중건하였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이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石物)이 남아 있는데, 길이 12자, 너비 9자, 두께 1자, 깊이 3자이며, 이 옆에는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과 기름틀이 있다. 또한 본당 뒤에는 사방 6자의 떡안반이 있다.

이 사지는 현재 서울의 중앙여자고등학교 소유로서 안내판만 있을 뿐이고, 여기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와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다.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0년 현재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답사노트>
※회암사는 영덕에서 약 340㎞ 떨어져 있는 거리로, 5시간이 넘게 달려 도착할 수 있었다. 영덕불교사암연합회 집행부 스님들이 동행하여 먼저 회암사지를 둘러보고, 곧 사지 위쪽에 위치한 회암사에 도착하였다. 지공화상께서 삼산양수(三山兩水) 천혜의 길지로 나옹왕사에게 이곳에 터를 잡으라 하셨다. 그 탓인지 절 주위의 바위와 소나무가 맑은 기운이 있어 보였다. 대웅전과 조사전을 참배하고, 조사전 우측 편에 무학대사와 지공화상, 그리고 나옹왕사의 부도탑을 참배한 뒤, 준비해간 자료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행장에 의하면, 나옹왕사께서 1344년(충혜왕 4)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곳 회암사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 전 묘적암 요연선사에게 여쭙기를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여기 왔을 뿐이거니와 볼 수 없는 몸을 보고 찾을 수 없는 물건을 찾고 싶다.”라고 하였지만 요연선사는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모른다. 다른 스승을 찾아 진리의 요체를 구하라.”고 하여 길을 나서 불법을 구한 지 5년 만에 회암사에 도착하였다. 석옹화상 회상에서 충목왕(忠穆王) 3년(1347) 정해년(丁亥年)에 정진을 이어가다 어느 날 석옹화상이 승당에 내려와 선상(禪床)을 치며 말하였다. “대중은 이 소리를 듣는가.” 대중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나옹왕사께서는 게송을 지어 보였다. 그 내용이 아래와 같다.

큰소리로 송(誦)하고 동행한 스님들과 다 같이 하산하다.

선불장에 앉아서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대구광역시 동구 해동로 5길18 101/401
  • 대표전화 : 053-425-1112
  • 팩스 : 053-982-0541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정원 / 통불교신문 후원계좌 / 농협 : 302-1286-8089-61 : 예금주 : 통불교신문
  • 법인명 : 통불교신문
  • 제호 : 통불교신문
  • 등록번호 : 738-35-00577
  • 등록일 : 2018-03-30
  • 발행일 : 2018-03-30
  • 발행인 : 裵哲完
  • 편집인 : 박정원 l 사장 : 김봉순
  • 통불교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통불교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tongbulgy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