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선 - 5 아난존자가 아라한을 증득함
내관선 - 5 아난존자가 아라한을 증득함
  • 통불교신문
  • 승인 2018.05.1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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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선열(禅悅)에 잠기고 안락하기

 

아난존자가 어떻게 아라한을 이루었는지 여러 도반은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한 후 마하가섭 존자는 정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500명의 아라한을 청하여 칠엽굴에 모여서 경전을 편찬했다. 경전을 득송할 사람으로 모두가 아난존자를 추천했다. 마하가섭 존자가 선정에 들어가 관찰해보니 아난존자는 그때 아직 아라한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이여, 당신은 자격이 없으니 나가주시오.”

아난은 매우 부끄러웠다. 부처님의 시자로서 불법을 가장 많이 들었지만 스스로 수행이 미치지 못해서 여전히 아라한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난존자는 행선(行禅)에 정진했다. 실외에서 경행을 지속했다. 지각을 유지하기 힘들고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으면 방에 들어가 휴식했지만, 여전히 지각을 유지하면서 모든 동작 전에 먼저 지각했다. , 나의 몸이 눕는다, 몸의 느낌을 지각한다, 손이 베개 위에 놓이고 머리는 베개에 닿는다…… 바로 머리가 베개에 닿는 그 순간에 아난존자는 철저히 깨달아서 아라한의 도를 성취했다.

아난존자가 다시 칠엽굴로 돌아왔을 때 석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그가 말했다.

문을 열어주시오, 나는 이미 아라한을 성취했습니다.”

마하가섭 존자가 대답했다.

이미 아라한을 성취했다면 신통력으로 석문의 문틈으로 들어오시오!”

사람들은 다시 아난존자를 경전 독송에 추천했다.

이 아난존자의 일화가 우리에게 주는 깨우침은 무엇인가?

첫째, 무익한 고행은 하지 말고 중도(中道)를 행해야 한다.

행선 수행을 오래 했다면 와선(臥禅)이나 좌선(坐禅)을 하는 것도 무방하다. 필요할 때 자세를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불필요한 고행은 하지 말라.

둘째, 분별하지 말라.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 한다는 식으로 분별하지 말라.

좋고 싫은 분별로 지속적으로 자세를 바꾸면 전정한 내관선에는 입문하지 못한 것이다. 중도를 행하지 않으면 좋거나 싫거나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의 습성이나 아집에 의해 자세를 바꾸지 말고 아주 필요할 때만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말하자면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그냥 그대로 지각해야 한다. 왜 그런가? 좋고 싫음은 명칭과 색의 작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속 어디에가 있는가? 하지만 범부 중생의 습성이 너무 깊어서 자신의 마음을 마치 연극을 보는 것처럼 주시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역할을 한다. 결국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악단의 지휘자가 되거나 연극의 감독이 되는데, 그에 따라 탐욕, 성냄, 어리석음, 오만, 의심의 습성은 더욱 심해진다.

여러분은 아무쪼록 이 내관선의 중요한 원칙을 파악하기 바란다. 원칙을 견지하기만 하면 지금 이 순간 지각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기울지 말아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는 것도 역시 그 속에가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걷고 식사하고 좌선하라.‘는 이 과정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방관자가 되어서 지각하기만 한다. 여러분은 아주 중요하고 기초적인 이 법문을 진실하게 수행하기 바란다. 자신의 습성에 따라 명상(名相)을 축적하지 말고 내가 한 말조차 각별히 기억할 필요가 없다. 영민한 지혜로 자신의 상황에 따라 진실로 정진하기 바란다. 수많은 명칭을 기억하거나 삼장(三藏) 12부 경전을 모두 암기한들 수행을 하지 않으면 걸어 다니는 책장일 뿐이라서 여전히 고통을 멸하지 못한다.

몇몇 도반은 불법을 오래 공부해서 이론적으로 많이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오염된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염은 계율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집, 아견, 아만이 그 속에 있는 오염을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오염을 결코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실제로는 진실한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소위 불법을 배웠다고 하면서 결과를 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붓다가 설한 무상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내 주변의 누구는 병이 들었고 누구는 죽었다.“

하지만 이것이 무상을 사유하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 마음속에 하나의 허망한 상()을 만들었을 뿐이라서 아직은 진정으로 입문도 못했고 어떻게 명칭과 색을 관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명칭과 색은 나누어서 관해야 한다. 그래서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시시각각 지각하라는 기본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 잠들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하나의 동작을 지각하고 누운 뒤에도 지각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눈이 감긴다…… 이 과정을 모두 지각한다. 나의 눈이 무거워 지는 것을 지각한 다음에 잠이 든다. 붓다께서 설하시길, 비구는 초야(初夜:저녁 8시 전후)와 후야(後夜:새벽 4시 전후)에는 경전을 읽고 경행하고 좌선을 하다가 중야(中夜:한밤중)에는 휴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정진하면 네 시간 수면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나머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더 자도 상관없다. 이때도 지각은 놓치지 말아야 하나, 언제나 맑은 지각을 유지하기 바란다. 여러분이 사념처(四念處) 수행에서 지속적인 지각을 유지함으로써 진정한 선열(禅悅)에 잠기고 안락하기를 바란다.

[통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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