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왕사 인연처-3 / 반송(盤松)과 나옹화상(懶翁和尙)
나옹왕사 인연처-3 / 반송(盤松)과 나옹화상(懶翁和尙)
  • 이철순
  • 승인 2020.01.1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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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정(盤松亭)
나옹왕사가 출가하면서 지팡이(반송)를 꽂은 반송

나옹왕사는 자라나면서 근기가 매우 뛰어나고 출가하기를 청하였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20세에 이웃 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여러 어른들에게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고 하여 공덕산 묘적암으로 출가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계기가 되어 출가하면서 심어 놓은 반송 에 관한 「창수면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반송(盤松)과 나옹화상(懶翁和尙)
신기리(新基里)에는 오래된 반송이 한 그루 있었는데, 이 나무는 나옹대사가 출가할 때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아 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지난 700여 년 동안 전설의 거목(巨木)으로 전해지고 있는 반송은 1965년 경에 고사(枯死)했으며, 1970년 경에 이곳 주민들이 그 자리에 사당을 짓고 선사(禪師)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다. 신기리를 반송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후 2008년 10월 21일 영덕군에서 주최하고 영덕문화원과 나옹왕사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여, 입적하신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지관큰스님께서 사적비 비문을 근찬(謹撰)하고 나옹왕사 사적비 제막과 더불어 반송기념식수를 하였다. 사적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愛애民민護호國국中중興흥佛불敎교懶나翁옹堂당慧혜勤근禪선覺각王왕師사碑비銘명
애민호국(愛民護國)으로 중생구제(衆生救濟)에 앞장섰던 나옹왕사(懶翁王師)의 전적(傳跡)에 대(對)해서는 문인각굉(門人覺宏)이 기록(記錄)한 행장(行狀)과 이색(李穡)이 찬(撰)한 양주(楊洲) 회암사(檜巖寺)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와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 보제존자탑지석(普濟尊者塔誌石) 금강산정양사삼한나옹명부도(金剛山 正陽寺三韓 懶翁銘 浮屠)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등(等)에 자세(仔細)히 전(傳)하고 있으므로 이 비(碑)에서는 중복(重複)을 피(避)하여 왕사(王師)의 애민호국(愛民護國)과 불교중흥(佛敎中興) 및 해외(海外)에서 국위(國威)를 선양(宣揚)하신 행적(行蹟)의 요해(要核)만을 기록(記錄)하고자 한다. 나무에는 뿌리가 있고 물에는 연원(淵源)이 있으며 사건(事件)에는 원인(原因)이 있듯이 인간(人間)에게도 조종(祖宗)이 있다. 위민선도(爲民先導)를 실천(實踐)하신 공동사회선지식(共同社會善知識)의 행장(行狀)을 밝혀 우리들이 살아가는 거울로 삼고자 이 비(碑)를 세운다. 왕사(王師)의 휘(諱)는 혜근(慧勤) 호(號)는 나옹(懶翁) 구명(舊名)은 원혜(元慧) 실호(實號)는 강월헌(江月軒) 속성(俗性)은 아씨(牙氏) 아버지의 휘(諱는) 서구(瑞具) 어머니는 정씨(鄭氏)부인(夫人)이니 영산군(靈山郡) 출신(出身)이시다. 1371년(一三七一年) 8월(八月) 26일(二十六日) 공민왕(恭愍王)이 왕사(王師)로 책봉(冊封)하고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근수(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 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찬호(讚號)를 올렸고 입적(入寂) 한 후 우왕(禑王)이 시호(諡號)를 선각(禪覺)이라 추증(追贈)하였다.

어느 날 어머님 꿈에 금색(金色) 새매가 날아와 오색(五色)이 영롱(玲瓏)한 알을 떨어뜨려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꾼 다음 임신(姙娠)하여 1320년(一三二0年) 1월15일(一月十五日) 경상북도(慶尙北道)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가산리(佳山里) 불암곡(佛巖谷) 인근(隣近)에 작소(鵲沼) 또는 작연(鵲淵:까치소)에서 탄생(誕生)하였다. 20세(二十歲) 되던 해 서당(書堂)에서 공부(工夫)하던 동학친구(同學親舊)의 죽음을 계기(契機)로 부모(父母)의 반대(反對)를 무릅쓰고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에서 당대(當代) 명필(名筆)인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은사(恩師)로 출가(出家)한 스님은 양가(兩家)의 홍은(鴻恩)을 보답(報答)코자 철저(徹底)히 수행(修行)하며 대원(大願)을 세워 삼보전(三寶前)에 발원문(發願文)을 [나옹선사 탄신 700주년 기념 나옹선사 법향法香 드러나다]고 지공(指空)으로부터 받은 문수최상승무생계법(文殊 最上乘無生戒法)에 따른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웠으니 첫째는 모든 중생(衆生)과 함께 성불(成佛)하지 않으면 나 또한 정각(正覺)에 오르지 않을 것이며 둘째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겪을 모든 고통(苦痛)을 내가 대신 받을 것이며 셋째는 모든 중생(衆生)의 혼매(昏昧)함을 지혜(智慧)로 바꾸어 줄 것이며 넷째는 일체중생이 겪을 재난(災難)을 안온(安穩)으로 바꾸어 줄 것이며 다섯째는 모든 중생(衆生)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바꾸어 줄 것이며 여섯째는 모든 중생(衆生)이 나와 함께 무상정각(無上正覺)에 이르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발원(發願)하였다. 1344년(一三四四)年부터 4년간(四年間)의 정진(精進) 끝에 크게 깨달음을 증득(證得)하였고 1348년(一三四八年) 구법차(求法次) 중국(中國)으로 가서 북경시(北京市) 선무구(宣武區)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親見)하였다.

지공(指空)이 묻되 어디서 왔는가 고려(高麗)에서 왔습니다. 배를 타고 왔는가. 아니면 신통(神通)으로 왔는가. 신통(神通)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통(神通)을 나에게 보여 줄수 있겠는가. 왕사(王師)께서 지공(指空)의 앞으로 나아가 합장(合掌)하고 섰다. 지공(指空)이 또 묻기를 네가 고려(高麗)로부터 왔다하니 동해(東海)의 어느 쪽에서 보아야 한눈으로 고려(高麗)를 볼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아직 보시지도 않았거늘 어찌 경지(境地)를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너로 하여금 이곳으로 오게 하였는가. 제 스스로 왔습니다. 무엇하러 왔는가. 고려불교(高麗佛敎)와 민생(民生)을 위해서 왔습니다. 하니 지공왈(指空曰) 여금여시(汝今如是)하니 오역여시(吾亦如是)라 인가(認可)하고 곧 대중(大衆)에 참여(參與)시켰다. 1350년(一三五0年) 8월(八月) 항주(抗州)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평산처림선사(平山處林禪師)로부터 다시 인가(認可)받고 수법제자(受法弟子)가 된 후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을 거쳐 아육왕사(阿育王寺)에서 오광장로(悟光長老)를 명주(明州)에서 무상(無相)과 고목화상(枯木和尙)을 1352년(一三五二年)에는 무주(婺州) 복룡산(伏龍山)에서 천암화상(千巖和尙)을 송강(松江)에서 요당(了堂)과 박암화상(泊巖和尙)등 제방(諸方)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친견(親見)한 후(後) 1352년(一三五二年) 10월(十月) 15일(十五日) 다시 법원사(法源寺)로 돌아왔다. 1356년(一三五六年) 10월15일(十月十五日)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命)으로 원도(元都)의 광제사(廣濟寺)에서 개당설법(開堂說法)을 가졌다. 1358년(一三五八年) 봄에 귀국(歸國)한 후(後) 오대산(五台山)과 한성[나옹선사 탄신 700주년 기념 나옹선사 법향法香 드러나다](漢城)에서 1361년(一三六一年)에 신광사(神光寺) 구월산(九月山) 용문산(龍門山) 원적산(元寂山) 1366년(一三六六年)에는 금강산(金剛山) 1367년(一三六七年)에는 청평사(淸平寺)에서 1369년(一三六九年)에는 다시 오대산(五台山)에 주석(主錫)하였다.


1370년(一三七0年) 봄 회암사(檜巖寺)에서 수법사(受法師)인 지공화상(指空和尙)의 사리(舍利)를 전(傳)해 받았다. 그 해 4월15일(四月 十五日) 광명사(廣明寺) 하안거(夏安居)에 참여(參與)하였으며 같은 해 9월(九月) 국가(國家)에서 시행(施行)하는 공부선(工夫選)을 주관(主管)하였고 1371년(一三七一年) 8월(八月)28일(二八日) 회암사(檜巖寺)를 떠나 9월27일(九月 二七日)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도착(到着)하여 주석(主錫)하던 중 1372년(一三七二年) 가을 홀연(忽然)히 너의 나라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 절을 지으면 불법(佛法)이 대흥(大興)하리라는 지공(指空)의 지시(指示)를 회상(回想)하고는 회암사(檜巖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지공(指空)의 사리탑비(舍利塔碑)를 세우고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였다. 1375년(一三七五년) 9월(九月) 우왕(禑王)의 즉위(卽位)와 함께 왕사직(王師職)을 사퇴(辭退)하였으나 왕(王)은 즉시(卽時) 직인(職印)과 함께 반려(反戾)하였다. 1376년(一三七六年) 4월15일(四月 十五日) 회암사(檜巖寺) 중창불사(重創佛事)의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마치고는 다시 사퇴서(辭退書)를 상달(上達)하였다. 그 이후(以後)로 더욱 왕사(王師)의 도덕(道德)을 흠모(欽慕)하여 서울을 비롯한 제방(諸方)의 신남신녀(信男信女)가 회암사(檜巖寺)로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불교(佛敎)가 흥성(興盛)하는 대회상(大會上)을 시기(猜忌)한 유생(儒生)의 무리중 사헌부(司憲府) 대간(臺諫)이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位置)한 회암사(檜巖寺)에 불자(佛子)들의 왕래(往來)가 계속(繼續)되어 분별(分別)없는 맹신(盲信)으로 가업(家業)을 폐(廢)할 지경(地境)에 이를까 두렵다하여 이 기회(期會)에 나옹회상(懶翁會上)에 신도(信徒)들의 접촉(接觸)을 금(禁)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마침내 교지(敎旨)를 내려 멀리 떨어진 밀양(密陽) 영원사(塋原寺)로 이석(移錫)케하여 호송관(護送官) 탁첨(卓擔)으로 하여금 배로 호송(護送)하던 중 피로(疲勞)를 빙자(憑藉)하여 며칠 쉬어가기를 청(請)하여 신륵사(神勒寺)에 잠시(暫時) 머물게 되었다.

1376년(一三七六年) 5월15일(五月 十五日) 진시(辰時) 가사장삼(袈裟長衫)을 갈아 입고 불전(佛前)에 향(香)을 피운 후 여주(驪州) 군수(郡守)와 대중(大衆)을 불러 앉히고 왕사직인(王師職印)을 군수(郡守)에게 전(傳)한 다음 혜명호지(慧命護持)와 애민호구(愛民護國) 그리[나옹선사 탄신 700주년 기념 나옹선사 법향法香 드러나다]고 출가초지(出家初志)를 잊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라고 부촉(咐囑)한 다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시니 세수(世壽)는 57세(五七歲)요 법랍(法臘)은 38하(三八夏)였다. 입적(入寂)하실 때 오색서광(五色瑞光)이 산정(山頂)을 덮었고 왕(王)이 하사(下賜)하여 스님이 타고 다녔던 백마(白馬)는 3일전(三日前)부터 먹지 않고 슬피울었다고 전(傳)한다. 다비(茶毗)한 후 화장장(火葬場) 재중(灰中)에서 치아(齒牙)와 정골(頂骨) 및 사리(舍利) 155과(一五五顆)와 기도(祈禱) 끝에 다비장(茶毗場) 백보경내(百步境內)의 나뭇가지와 암상(巖上)에서 분신사리(分身舍利) 558과(五五八顆)를 수습(收拾)하여 사리탑(舍利塔)은 회암사(檜巖寺)에 치아(齒牙) 및 정골(頂骨)은 신륵사(神勒寺)에 각각(各各) 봉안(奉安)하였다. 왕사(王師)의 입적(入寂) 후(後) 632년(六三二年)을 맞이하여 장육사(莊陸寺)를 비롯한 왕사(王師)의 유적지(遺蹟地)와 사상(思想)을 새롭게 조명(照明)하기 위한 기념사업회(記念事業會)가 발족(發足)되고 즈음에 왕사(王師)께서 애민호국(愛民護國)하신 큰 덕(德)을 기리고자 김병목(金炳睦) 영덕군수(盈德郡守)의 발의(發意)와 김관용(金寬容) 경북지사(慶北知事)의 후원(後援)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의 뜻을 모아 왕사(王師)께서 출가시(出家時) 지팡이를 꽂아 두었다고 전(傳)해 오는 반송정(盤松亭)에 이 비(碑)를 세우게 되었다. 왕사(王師) 행적(行蹟)의 요해(要核)만을 이상(以上)과 같이 약술(略述)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명왈(銘曰)

애민흥불(愛民興佛) 원력(願力)으로 다겁수행(多怯修行) 공덕(功德) 닦아, 대해(大海)같은 서원(誓願)으로 영해(寧海) 땅에 탄생(誕生)할 때 금색(金色) 새매 알을 주는 태몽(胎夢)으로 탁태(托胎)할세, 아서구(牙瑞具)를 아버지로 정부인(鄭夫人)을 모친(母親) 삼다 사서삼경(四書三經) 통달(通達)하여 경세지략(經世智略) 탁월(卓越)한들, 슬프도다 나의 친구 요사(夭死)함을 어이할꼬 생야일편(生也一片) 부운기(浮雲起)요 사야일편(死也一片) 부운멸(浮雲滅)일세, 출가시(出家時)에 부모만류(父母挽留) 뿌리치고 떠나갔다 사불산(四佛山)의 묘적암(妙寂庵)서 요연선사(了然禪師) 은사(恩師)삼고, 삭발염의(削髮染衣) 득도(得度)한 후 [나옹선사 탄신 700주년 기념 나옹선사 법향法香 드러나다] 여구두연(如救頭燃) 정진(精進)하다.

구법중국(求法中國) 법원사(法源寺)서 지공화상(指空和尙) 친견(親見)하고, 축착합착(築着榼着) 줄탁동시(啐琢同時) 확철대오(廓撤大悟)하신 후에 지공화상(指空和尙) 인가(認可)하되 여금여시(汝今如是) 오역여시(吾亦如是), 나옹답왈(懶翁答曰) 미즉중생(迷則衆生) 오즉진찰(悟則塵刹) 본자법신(本自法身) 평산처림(平山處林) 갱인(更印)하되 수법인연(受法因緣) 맺으시고, 문수보살(文殊菩薩) 무생계(無生戒)를 왕사(王師)께서 계승(繼承)하다. 상구보리(上求菩提) 선교겸수(禪敎兼修) 육대원(六大願)을 돈발(頓發)하니, 일체중생(一切衆生) 공성불도(共成佛道) 일체중생(一切衆生) 고보대수(苦報代受) 일체중생(一切衆生) 지혜명달(智慧明達) 일체중생(一切衆生) 왕생극락(往生極樂), 일체중생(一切衆生) 삼학구족(三學具足)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성정각(同成正覺) 광제사(廣濟寺)서 개당(開堂)하곤 구법(求法)길을 회향(廻向)하고, 전법(傳法)위해 귀국(歸國)하여 공민왕(恭愍王)의 왕사(王師)되어 공부선(工夫選)을 주관(主管)하고 애민호불(愛民護佛) 잊지않다, 세수오칠(世壽五七) 법랍삼팔(法臘三八) 왕사직(王師職)을 사임(辭任)하고 대중(大衆)에게 부촉(咐囑)한 후 가부(跏趺)하고 입적(入寂)하니, 왕사백마(王賜白馬) 절사비곡(絶飼悲哭) 오색서운(五色瑞雲) 산정(山頂)덮다 회암사(檜巖寺)에 사리탑(舍利塔)을 신륵사(神勒寺)엔 정골봉안(頂骨奉安), 왕사적후(王師寂後) 632년(六三二年) 평화(平和)적인 남북통일(南北統一) 하루속히 이루도록 해마중의 영덕(盈德) 땅에, [나옹선사 탄신 700주년 기념 나옹선사 법향法香 드러나다]
사부대중(四部大衆) 뜻을 모아 이 정석(貞石)을 세우노니 동해(東海)바다 고갈(枯渴)하고 허공계(虛空界)가 다하도록, 비로자나(毘盧遮那) 진법신(眞法身)이 온 국민(國民)을 지켜지다.


佛紀二五五二年(2008)十月 二一日
大韓佛敎曹溪宗總務院 院長 伽山 智冠 謹撰
艸堂 李武鎬 謹書
불기 2552년(2008) 10월 21일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 원장 가산 지관 근찬

초당 이무호 근서

<답사 노트>
※반송정에 가서 사적비의 내용을 메모하여 기록하였는데 「창수면지」에 위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2008년 10월 21일 반송유적지 일대에서 나옹왕사 사적비 제막 및 경축음악회를 봉행하였는데 당시 소승도 참석하여 참관하였다. 또한 2016년 10월 8일 토요일 오전 10시 반송정 일원에서 ‘제1회 나옹문화제 및 제9회 창수면민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창수면이 주최하고 나옹문화제 추진위원회와 창수면체육회에서 주관하고 경상북도와 영덕군, 창수면 향우회, 나옹왕사기념사업회에서 후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옹문화제가 나옹왕사기념사업회나 영덕군에서 주최하지 않고 창수면에서 주최하여 규모면이나 내용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던 행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문화제를 기대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옹왕사께서 쓰신 게송 한 편을 송(誦)해 본다.

혜선자(慧禪者)가 게송을 청하다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하고 각별히 집을 나왔으니
공부에 달라붙어 바로 의심 없애라
목숨이 딱 끊겨 하늘이 무너지면
오뉴월 뜨거운 하늘에 흰 눈이 날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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