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충효사, 무상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단징산.성도 3박 4일 성지순례
영천 충효사, 무상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단징산.성도 3박 4일 성지순례
  • 배성복 기자
  • 승인 2019.11.2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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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 해공큰스님과 떠나는 충효사 성지순례단 “참나를 찾아서”
신라왕자 무상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단징산, 성도 순례

영천 충효사(회주 원감 해공스님) 성지순례단 40명은 1118일부터 21일까지 34일간 중국 단징산과 성도 일대에 흩어진 신라왕자 출신의 정중무상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어화굴 대불부처님을 참배하는 해공스님 @ 통불교신문]
[어화굴 대불부처님을 참배하는 해공스님 @ 통불교신문]

원감 해공큰스님과 함께 떠나는 충효사 성지순례단은 작년 1022일 중국 설두산 신창대불을 다녀 온 뒤 제주도 성진순례 등 현장감 있는 구법여행으로 참 나를 찾아가는 순례법회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 금화사 참배 @ 통불교신문]
[ 금화사 참배 @ 통불교신문]

이번에 다녀온 중국 청두 성도는 신라왕자 출신의 무상선사가 수행하던 곳을 둘러보고 당시 선사님의 수행환경, 수행풍토, 선풍, 중국 현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들의 일정을 동행하여 취재를 하였다.

[금화사 주지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해공스님@통불교신문]
[금화사 주지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해공스님@통불교신문]

먼저 18일 오후에 대구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했다. 대구, 부산, 울산, 포항 신도들로 한 곳에 모여 함께 이동하였다. 인천공항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여 성도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12시가 넘었다.

공항에서 가이드를 만나 호텔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순례단에는 젊은 불자님들도 있었지만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모두들 순례길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그렇게 설렘의 하룻밤을 보내고, 19일 아침 630분에 일어나 아침공양을 하고 8시에 단징산으로 이동하였다. 성도에서 단징산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되는 꽤 먼 곳이었다. 단징산에는 무상선사님의 사리가 방치된 채 아무도 모르다가 최근에야 발견되어 재조명되고 있는 금화사가 있기 때문이다.

[금화사 주지스님과 대중들이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위하여 특별법회를 열어주었다@통불교신문]
[금화사 주지스님과 대중들이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위하여 특별법회를 열어주었다@통불교신문]

이곳 금화사에는 무상선사(無相禪師·684762)의 사리탑이 1200여 년 동안 방치되다가 최근에야 발견되어 확인된바 있다.

이는 지난 2001년 중국 불교의 성자로 추앙받는 오백나한(五百羅漢) 455번째 조사(祖師)가 무상선사인 사실이 확인된 뒤 발견되어 그동안 도외시돼온 무상선사에 대한 불교학계의 연구와 한,중 간의 불교문화교류연구에도 큰 사료로 평가받으면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 특별법회를 열어주고 있다@통불교신문]
[ 특별법회를 열어주고 있다@통불교신문]

무상선사는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의 셋째 왕자이다. 성덕왕(?˜737)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타계하자, 성덕왕은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른 특히 당나라의 신진문화를 받아들였던 뛰어난 개혁 군주였다고 한다.

[금화사 대웅보전@통불교신문]
[금화사 대웅보전@통불교신문]

무상선사의 출가에 대해 역대연보기에 보면 무상선사가 어릴 적, 바로 손위 누나가 출가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왕가에서는 그녀를 억지로 시집보내려고 했다. 누나는 칼로 본인의 얼굴을 찔러 자해하면서까지 출가코자 하는 굳은 의지를 사람들에게 보였다. 무상은 출가하고자 하는 누나의 간절한 불심(佛心)을 지켜보면서 여린 여자도 저런 마음을 갖고 출가하고자 하는데, 사내대장부인 내가 출가해 어찌 법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강한 의지를 품었다.” 이후 성인이 된 무상은 군남사(群南寺)로 출가하였고, 얼마 후 728(성덕왕 27) 44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고 한다.

[무상선사의 유골사리 친견하는 해공스님@통불교신문]
[무상선사의 유골사리 친견하는 해공스님@통불교신문]

무상선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현종(712˜756 재위)을 알현하고, 현종은 무상선사에게 섬서성 장안(西安)에 위치한 선정사에 머물도록 했다. 선사는 현종의 지시대로 선정사에 머물다 사천성으로 옮겨 당대에 선의 위상을 떨치고 있던 자주(資州)의 덕순사(德純寺) 당화상이라고 불리는 처적(處寂) 선사를 찾아갔다. 처적선사는, 4조 도신-5조 홍인-자주 지선-처적으로 법맥이 이어진다.

[금화사 기념촬영 @ 통불교신문]
[금화사 기념촬영 @ 통불교신문]

무상선사가 덕순사(寧國寺)로 찾아가 처적선사 뵙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처적은 병을 핑계로 무상을 만나주지 않았다. 무상은 며칠 동안 제자로 받아들여줄 것을 스승에게 간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무상은 자신의 구법 의지를 보여주고자 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을 감행 그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선사의 이름이 나오는 비석설명@통불교신문]
[무상선사의 이름이 나오는 비석설명@통불교신문]

무상선사는 2년간 덕순사에 머물며,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처적으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금화사 주지스님은 친필로 글자를 써서 해공스님께 선물했다@통불교신문]
[금화사 주지스님은 친필로 글자를 써서 해공스님께 선물했다@통불교신문]

무상선사가 처적선사에게 가사를 받고는 바위굴에 들어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진다. 무상선사의 두타행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으며 김두타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금화사에는 무상선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으며, 합장염불속에 사리탑에서 나온 무상선사의 유골사리를 친견하였다.

금화사 주지스님은 순례단을 반갑게 맞이하여 안내를 하고 원감 해공스님과 많은 대화를 통하여 정중무상선사를 회상하였다. 금화사는 현종이 금화공주를 위하여 지어진 궁궐이었는데 무상선사에게 맡겨 금화사가 되었다고 한다. 선물교환에 이어 금화사에서 마련한 점심공양을 맛있게 먹고 산을 내려왔다.

[나한사 참배 455번째 무산선사의 나한상 앞에서@통불교신문]
[나한사 참배 455번째 무산선사의 나한상 앞에서@통불교신문]

이어서 시방시에 있는 나한사로 갔다. 나한사는 무상선사의 제자이자 중국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스님이 출가한 사찰이다. 나한사의 나한전에는 마조선사의 스승인 무상선사가 오백나한 중 455번째 나한으로 모셔져 있다.

나한사 경내로 깊이 들어가면 마조선사의 조사상과 위패를 모신 전각이 있다. 대웅보전 앞 법당안에는 비심비불(非心非佛)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적혀있다.

나한사를 참배하고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었다.

[저녁공양 식당에서 순례단을 환영하는 현수막@통불교신문]
[저녁공양 식당에서 순례단을 환영하는 현수막@통불교신문]

이틀째날인 20일에는 자주라는 곳에 있는 녕국사를 참배하였다. 녕국사(옛 덕순사)는 무상선사가 처적선사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이라는 호를 받은 사찰이다.

녕국사 주지스님의 자상한 안내로 각 전각을 돌며 참배하고 무상선사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특히 무상선사정중당이라는 전각에는 무상선사의 유물전시관으로 꾸미고 있었다.

[녕국사 참배, 주지스님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통불교신문]
[녕국사 참배, 주지스님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통불교신문]

이어서 오후에는 무상선사가 굴속에서 수행하였다는 어하굴을 참배하였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의 좁은 길을 따라 약 30분 들어가니 어하굴이 나타났다. 어하굴에는 자연바위에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문화혁명 당시 훼손되어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원감 해공스님은 무상선사의 존상을 참배하고는 눈물을 닦으며, “밤에 잠을 자는데 현몽을 통하여 정중무상선사께서 나타나 법을 부촉하여 받아 지녔다면서 무상선사께서 화현하신 것이다고 했다.

[무상선사정중당 앞에서 @통불교신문]
[무상선사정중당 앞에서 @통불교신문]

그러면서 해공스님은 무상선사가 누군지 모르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는데 밤마다 꿈에 나타난 나한이 바로 455번째 정중무상선사였다고 했다. 이렇게 훌륭한 선사님의 유적이 방치된 것을 보니 눈물이 났다고 해서 순례단의 심금을 울렸다.

[무상선사가 굴속에서 수행했다는 어하굴@통불교신문]
[무상선사가 굴속에서 수행했다는 어하굴@통불교신문]

어하굴을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작은 마을 지나는 순간 마을사람들이 나와 순례단을 지켜보았다. 그 중에 한사람이 해공스님을 보고는 스님이 지나가니 고을이 훤하다고 했다. 순간 순례단은 깜짝 놀라 여기도 한국말을 하는 분이 있다며 뒤돌아서서 물었다. 어느 분이 한국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하굴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난 마을사람들@통불교신문]
[어하굴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만난 마을사람들@통불교신문]

그런데 분명 순례단에게는 그렇게 들렸고 그 말을 확인해 보니 중국말인데 발음이 그렇게 들렸다는 것이다.

하도 기이하여 순례단은 이는 분명 정중무상선사가 화현하신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무상선사의 수행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어하굴은 앞으로 정비하고 고증을 통하여 선사의 선사상에 대하여 정립할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 무상선사 상 앞에서 참선중인 해공스님@통불교신문]
[ 무상선사 상 앞에서 참선중인 해공스님@통불교신문]

이어서 성도로 돌아와 대자사를 참배했다.

대자사는 무상선사께서 나이 72세 무렵 무상이 사천성 성도에 머물며 수행할 때 당시 현종이 안사의 난(755˜763)을 피해 섬서성 장안(西安)에서 이곳으로 피신 왔다. 이 무렵 현종은 성도에 머물고 있는 무상 대사에게 대성자사(大聖慈寺)’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이 사찰을 중건 불사해 머물도록 했다. 당시 대성자사는 96개의 정원과 1000여 폭의 벽화가 있을 정도로 성도에서 가장 큰 도량이었고, 진단제일총림(震旦第一叢林)이라고 불리었다. 절 주변은 당시 외국인들이 교류하는 국제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대자사 참배@통불교신문]
[대자사 참배@통불교신문]

대사는 말년에 정중사에 머물며 제자를 지도했다. 762519, 제자들에게 나에게 깨끗한 새 옷을 주어라. 목욕하고 싶다고 말한 뒤, 자시(子時)가 되자, 좌선한 모습으로 입적했다. <역대법보기>에는 무상대사 열반 후에 신이한 모습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해와 달은 빛을 잃고, 천지는 백색으로 변했다. 법의 깃대는 부러지고, 니련선하의 강물이 말랐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렸고, 수행자들에게는 의지처가 끊어졌다.” 무상이 사천성에 머문 지 34년째, 세속 나이 79세로 고국이 아닌 타향에서 입적했다.

[중국 전통복장을 한 중국인도 줄을서서 분향@통불교신문]
[중국 전통복장을 한 중국인도 줄을서서 분향@통불교신문]

무상의 대표적인 선사상은 인성염불과 3구설법(三句說法)이다. <역대법보기>에 전하는 내용을 보자. “무상대사는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인에게 계를 주었다. 그는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고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 설법했다.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먼저 소리를 내어 염불하도록 하고(引聲念佛), 마음을 다하여 집중해 소리가 가늘어지면서 끊어지려는 무렵,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妄)하라’”

[대자사에 모셔진 무상선사 근영@통불교신문]
[대자사에 모셔진 무상선사 근영@통불교신문]

무상선사가 대중들에게 소리를 내어 염불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바로 인성염불을 말한다. 무상대사는 염불행자이거나 정토행자는 아니지만. 다만 삼매(선정)에 쉽게 들기 위한 방편으로 염불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단지 부처를 염함으로써 자신의 청정한 자성 자리에 입각한 본성을 자각하기 위한 것이 무상 대사가 활용한 인성염불의 의미이다.

[대자사 참배 기념촬영@통불교신문]
[대자사 참배 기념촬영@통불교신문]

그리고 원문 마지막의 무억·무념·막망을 3구설법이라고 한다. 무억은 생각으로 억측하거나 번뇌가 만든 상()을 떠나는 것이고, 무념은 일체 번뇌로운 생각인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막망은 어떤 것이든 허망한 생각이 없이 본성에 입각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것이다. 무념의 선지를 강조하기 위해 제시하는 3구설법과 3(三學)을 구체적으로 실천케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성염불을 도입한 것이다. 무상대사는 앞에 전개한 3구를 수행차원에서 계··3학에 배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억은 계()이고, 무념은 정()이며, 망념이 없는 것은 혜()라고 한다. 3구가 총지문(摠持門)이다.”

<원각경대소초>에 보면 무상대사의 3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억은 지나간 과거에 대해 집착하거나 추억하지 않는 것이고, 무념은 미래의 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것이며, 막망은 현재의 일에 대해 지혜와 상응해 잡되거나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다.”

[ 변검 공연관람@통불교신문]
[ 변검 공연관람@통불교신문]

중국의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 부처님의 첫 제자들 5비구 가운데 한 사람인 교진여가 포함되고, 선종 초조 달마대사는 307번째 나한이다. 반면 6조 혜능과 임제 의현이 제외될 정도이다. 무상선사는 육조혜능대사보다도 더 존경을 받은 인물로 중국 정중종의 개조로 알려졌다.

이 정중종이 티베트불교에 최초로 영향을 미쳤다. 즉 티베트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분이 무상선사인 것이다.

무상선사가 나한으로 모셔져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중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분임이 확실하다.

[돌산에 새겨진 부처님@통불교신문]
[돌산에 새겨진 부처님@통불교신문]

동아시아 선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선사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인데, 이 마조선사가 무상선사의 제자이다.

대자사 참배를 마치고 저녁에는 중국 성도의 대표적인 공연인 경극을 관람하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1박을 보내는 강행군이었지만 무상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떠난 순례길이 이렇게 의미 있는 길 인줄 몰랐다고 했다. 흔히들 면세점이나 물품을 파는 곳을 경유하는데 이번 일정은 철저하게 순례길로 일정이 짜인 그야말로 살아있는 현장감 있는 대법회였다.

영천 충효사 성지순례단은 다음 순례는 인도로 가서 8대 성지를 둘러보고, 네팔의 부처님탄생지 룸비니도 참배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편 이번 순례에는 포항 대성사 회주 운붕스님, 기계 등대사 주지 혜성스님, 마산 허정선원 주지 허정스님, 정휴스님, 대암스님이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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